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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조리학과 소개

  • 안주조리학과 란?
    오늘은 어떤 안주로 한잔할까? 꼭 안주가 아니더라도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는 학우를 위한 공간입니다. 여러분의 안주를 등록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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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 소개

  • 사회학과 란?
    술자리에서 정치,경제,사회 얘기가 빠질 수 있나요. 우리 사회에대한 촌철살인의 토론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개념탑재는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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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화학과 소개

  • 폭탄주화학과 란?
    나만의 술마시는법, 폭탄주만드는법, 칵테일주 만드는법 뭐라도 좋습니다. 진짜 폭탄은 만드시면 아니아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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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가무학과 소개

  • 음주가무학과 란?
    음주에는 가무가 빠질 수 없죠. 자신의 열여덟번째곡, 또는 직접 녹음한 음악, 노래방에서 부르면 좋을 노래 동영상 등 자신의 끼를 발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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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교양]영동선에서 만난 사람2
검은 선탄장이 산처럼 드리워진 철암역(鐵岩驛)은 태백 지역의 무연탄을 전국 각지로 보내던 역이다. 한창일 땐 300여 명이 근무했을 정도로 매우 큰 역이었지만 석탄 산업의 쇠퇴로 많은 사람이 떠나가게 된 지금은 조용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다. 지난 영광스러운 모습은 이제 까마득한 옛날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꽃피는 봄이 오면 복도를 거닐다가 입춘대길(立春大吉)이 쓰여 있는 한 현관문을 보고 발길을 멈췄다. 아직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 벌써 입춘대길을 붙여 놓은 이유는 뭘까. 벌써 봄을 기다리는, 이곳에 사는 어르신은 어떤 분일까. 살짝 열려있는 현관문 사이로 할아버지 두 분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입춘대길을 보고 왔다고 하니 절에서 받은 거라며 허허 웃음 짓던 할아버지께서는 낯선 우리에게 경계의 낯빛 대신 들어오라는 따뜻한 한마디로 응해 주셨다. 지난 세월, 탄광에서 일하며 40여 년 간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할아버지는 홀로 이 겨울을 나고 계셨다. 할아버지 여기 2, 3층에 사람들이 살고 있나요? 그렇지. 201호부터 215호까지 15집, 301호부터 315호까지 15집. 30가구 되지. 이게 원래 1세대당 가게를 내줬어. 장사하라고. 시에서 분할해 준 거거든. 그런데 인제 탄광이 폐광이 되가지고 사람들도 다 가 뿌리고 그래서 가게가 다 비어뿐 거지. 지금은 30가구가 다 살지 않는 거죠? 응, 그렇지. 2층에는 다 있는데 3층엔 몇 가구 없어요. 다 떠나가고 인구가 없으니까 장사도 안되지. 그러니 다 제 살길 찾아 떠난 거지. 뒤에는 가게가 하나도 없고, 그래도 앞 가게는 몇 가게 좀 있어요. 집이 생각보다 커요, 할아버지. 그때 당시 엄청 인기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어요? 석공 아파트라고 해서 거기랑 여기랑 아마 같이 지었을 거예요. 거기는 인자 석탄공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들어갔던 데고 이거는 인제 시청에서 여기서 장사하고 먹고살라고 지은 거고. 여기가요. 황지(현재 태백의 번화가)도 여길 못 따라갔어요. 지금은 시청 소재지잖아요.. 할아버지께서는 여기서 사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나는 한 여기에 40년 살았지.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여든. 정말 젊은 시절 여기서 다 보내신 거네요. 그런 셈이지. 할아버지는 원래 여기 분이신 거예요? 아니, 나는 충북 단양. 돌아 돌아 오다 보니까 마지막에 여기로 왔네. 탄광 산업이 한창일 때 오신 거예요? 이 탄광이 6,25 전쟁 일어나가지고 생긴 거거든. 난 그때는 동해에서 살았고. 군대 갔다 오니까 할 일도 없고 부모가 못 살아가지고 재산 물려 받은 것도 없고.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병에 걸린 거지. 진폐증 걸리니까 농사 지으려고 했는데 농사도 짓다가 자금이 없어서 안돼, 그래서 농사도 못 짓고, 고향도 못 가고 여기서 살고 있는 거지. 진폐증은 탄광생활 때문에 얻으신 거예요? 그렇지. 그 병은 불치병이래. 못 고치는 병이래. 폐에 탄가루가 다 들어갔으니까. 탄광에서 얼마나 일하셨어요? 탄광에서 한 30년 했습니다. 지금 그래서 진폐에 걸려 가지고. 기침도 나고, 숨도 차고 목에서 가래도 올라오고. 어디 갈 데도 없고 나가지 못해서 살고 있는 거지. 여기 뭐 다들 진폐 환자들이지, 뭐. 우리나라의 산업 역군이셨네요. 나라가 어려울 때 우리가 산업 역군으로 불렸었지. 나라를 키운 이들이지. 그래도 그걸 나라에서 인정해줘서 진폐증을 법제화 했는데 그것도 급수가 있어 가지고… 급수가 있어요? 13급부터 1급까지. 제일 말단 급수가 13급이고 1급은 죽은 사람. 그런 분들이 많죠? 많죠. 여기 달력도 진폐협회에서 준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일하셨을 때만 하더라도 탄광이 잘 됐어요? 아유, 아주 잘 됐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탄광에서 벌어먹어야 했지. 결국 고향도 못 가고 돈도 못 벌고. 왜 못 버셨어요? 그때만 해도 가족이 많았거든. 부모님 있었지, 식구 있지, 동생 있지, 애들 있지. 다 책임지고 살다 보니까 돈이 안 모여. 돈도 못 벌고, 몸만 아프고. 그런데 할아버지 생각보다 집이 무척 따뜻해요. 연탄 때놨으니께. 연탄을 어디서 때우세요? 저기 뒤에 보일러실이 있거든요. 연탄 보일러 처음 봐요. 할아버지. 처음 봐요? 기름 보일러는 안 쓰시는 거예요? 저거 연탄 하나에 500원인가 해요. 기름 보일러는 비싸잖아요. 요새는 기름값 내렸다는데 그래도 비싸지. 그리고 바로 앞에서 연탄이 아직까지 나니까. 이 집을 지을 때 연탄 보일러랑 기름 보일러를 다 해놨거든. 그래서 기름 때는 집도 몇 집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 연탄이지. 불편한 건 없으세요? 가스는 다 배출이 되니까. 막 연탄 가스 때문에 죽었다는 사람들 나오는데 그건 연탄 가스가 배출이 되지 못하니까 그런 거고 여기는 다 배출 잘 되도록 해놨어요. 그런데 연탄 보일러가 삼방이거든, 삼방. 3개를 한꺼번에 태워요. 하루에 한 두 번씩 갈아줘야 하긴 하지. 이 지역 흥했을 시절,가끔 생각나세요? 그렇지. 황지 쪽에도 일체가 탄광이었고, 장성도 탄광이었고. 황지가면 그 어디냐 고개 넘어가면 광업소가 있었지. 전부 탄광세상이었어. 그런데 석탄이 자꾸 없어지니까 문닫고, 문닫고. 그리고 다들 없어지고 여기 남은 거는 석탄공사 하나인 거지. 사시는 분들은 다들 연세가… 거의 다 80 다됐죠. 여기서 뭘 벌어먹고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뭐 벌게 있어야지. 그러니까 나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러니까 늙은 사람들만 남은 거지. 늙고 병든 사람. 할아버지는 떠날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힘이 없지. 갈 능력이 안 되는 거지. 신식인데 가려고 해도 관리비만 해도 20만 원 나온다는데 여기는 관리비가 없어. 전체 생활비가 20만 원도 안 드는데. 다행히 집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쌓여있는 연탄과 집안 가득히 퍼져 있는 따뜻한 온기 덕분에 이 추운 겨울을 잘 보내시고 계신 것 같아 조금이나마 안도했다. 지난 세월, 그것이 청춘인지 모르고 일 만하다 지나간 세월을 더듬던 할아버지는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여러 길을 돌고 돌아 결국 광부의 삶을 살수 밖에 없었던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여쭤본 질문마다 할아버지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훨씬 많이 풀어주셨다. 우리가 아닌 스스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되뇌는 것처럼 말이다. 입춘대길을 보고 들어왔다는 우리의 말에 말없이 허허 웃으셨지만, 할아버지도 어여 빨리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를 바라시는 듯 활짝 웃어 보이신다. 어여 봄이 왔으면 좋겠다. 연탄을 태워야 하는 할아버지의 수고도 덜고, 얼었던 빙판길도 녹아 할아버지가 동네 산책도 다닐 수 있는 그런 봄 말이다. 따뜻한 햇살이 집안 가득 비출 수 있는 봄이 할아버지께 성큼 다가왔으면 좋겠다.
교수 : 교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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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문학부]메리 크리스마스
내일이 무슨 날이신지 다들아시죠? 해마다 우리들은 12월 24일이 되면 서로에게 주고받는 인사가 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왜 하필 메리 크리스마스 일까 생각해보신적 있으세요? 해피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즐거운 크리스마스도 아닌 메리 크리스마스 도대체 왜 "Merry Christmas" 일까요?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은 오늘 문득 의미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메리크리스마스에어떤 뜻이 담겨있는지 알면보다 뜻 깊은 성탄절을 보내지 않을까 하는 바램에서 글을 적습니다. 크리스마스는 Christ(크라이스트)는 한국 발음으로 그리스도. 즉, 예수님을 의미하며, mas는 천주교에서 "미사" 를 드린다는 'mass'에서 's'를 떼어내어Christmas 라는 합성어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 와 mas의 합성어로 "예수님에게 미사를 드린다" 라는 뜻이 되겠죠. 그렇다면 Merry 가 왜 Christmas 앞에 붙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에서 Merry는 그림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Merry Christmas 는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경배하자"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필자는 기독교인이 아닌데,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인사를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술 한잔 기울리는 크리스마스가 더 좋은 의미인것 같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이상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든 학우분들 "Merry Christmas~~"
교수 : 교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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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강의

[핵심교양]영동선에서 만난 사람1
소설<묵호를 아는가>에서 소설가 심상대는 묵호를 "한 잔의 소주와 같은 바다였다"고 말한다. 검을 묵(黑), 호수 호(湖). 먹빛처럼 검푸른 바다의 도시는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종착지로, 또 다른누군가에게는 비릿한 일상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런 묵호 사람들의 애환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호 바다는 여전히 잔잔하기만 하다. 그렇게 묵호를 품고 있을 뿐이다. 무코동블루스 3년 전쯤이었을까. 낯설지만 왠지 푸른 바다를 가득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안고 묵호로 향했다. 무척 쾌청한 여름날, 묵호는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한적했고, 맑은 하늘을 가진 동네였다. 뜨거운 햇볕에 연하게 빛나는 묵호의 푸르름이 괜스레 더욱 좋아졌고, 그래서 이제는 당연히 들려야만 하는 목적지가 되었다. 묵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말린 가오리와 명태가 줄지어 있는 건어물 가게들, 쥐포 한번 먹어보라며 손짓하는 가게 주인장과 생동감 넘치는 묵호 어시장까지. 그런 익숙한 풍경 속에 저 멀리 파란 벽이 눈에 띄었다. 무척 진한 파랑이 칠해진 그곳엔 '우리가 파랑하는 시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가 파랑하는 시간'이 쓰여진 공간은 갤러리 묵호짬뽕의 건물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해낸 사람들은 프로젝트 미터라는 창작 집단이다. 프로젝트 미터는 예술의 공공성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이 모인 시각예술 단체로 묵호등대마을 벽화 그리기 작업에 초기부터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묵호로 이주해 예술로 지역 살리기에 전념하고 있다. 우연히 들어간 '모모의 하루'라는 카페에서 우리는 프로젝트 미터를 다시 마주했다. <MUKO>라는, 프로젝터 미터에서 만든 책 안에는 그들이 바라본 묵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 우리가 알지 못했던 묵호 이야기 하나 한 3년 전에 묵호에 처음 왔을 땐 '우리가 파랑하는 시간'을 본 적이 없거든요. 대표님이 하는 거예요? 네. 왜 우리가 파랑하는 시간이에요? 작년에 강원문화재단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돼서 레지던시를 진행하게 됐는데 그때 주제가 '우리가 파랑하는 시간'이었어요. 신진 작가들이 묵호에 내려와서 묵호와 파랑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 과거의 묵호가 어땠고, 현재의 묵호가 어떤지에 대해서 작품으로 실현하는 과정을 진행했거든요. 그래서 파랑을 주제로 전시를 하게 됐어요. 묵호에파랑색이 눈에 많이 띄나요? 사실 파랑은 많은 분들이 좋아하고 사용하는 색 중 하나잖아요. 묵호의 파랑을 찾고 파랑의 느낌이나 공간들을 찾아보면서 이야기나 주제를 생각을 해보자는 취지로 하게 된 거예요. 블루라는 게 블루 프린트라고 해서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묵호는 반대로 우울하죠. 여기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나 현재의, 약간은 우울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우울한 일이란 게 어떤 건가요? 과거에 묵호는 굉장히 잘나갔던 도시였거든요. 현재 동해시 인구가 10만 명이 채 안 되는데 1970~80년대만 해도 묵호 이 작은 동네에서 6만 명 이상이 거주했다고 해요. 그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길을 지나다닐 때 어깨를 부딪히면서 다닐 정도로요. 그런데 환경이 바뀌고 도시개발이 되다 보니까 구도심이 되어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떠난 지금의 모습이 묵호의 우울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죠. 빈집도 많고, 어르신만 계신 집도 많고. 과거의 묵호와 현재의 묵호가 천지차이로 다른데 이러한 이야기들을 잊고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예술적 감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그걸 통해 앞으로 우리가 묵호의 모습을 그려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묵호는 잘나가다가 왜 쇠퇴하게 된 거예요? 여기가 원래 오징어와 명태로 굉장히 유명했대요. 그러니까 전국에서 먹는 오징어와 명태 90%는 여기서 나갔다고 해요. 명태, 오징어가 굉장히 잘 나던 시절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벌다 보니까 도시가 커진 거죠. 저희가 만든 <MUKO>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묵호는 '삶의 마지막기항지'라는 말이요. 전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인생의 쓴맛을 보고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묵호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착하던 곳이기도 해요.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곳이죠. 갤러리 이름은 왜 묵호짬뽕이에요? 저희가 지은 건 아니고 저희랑 함께 지역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협동조합 행복발전소라는 곳이 있는데 그분들이 사용하던 공간이었어요. 여길 리모델링해서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만들게 된 곳이에요. '묵호는 뭘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생각 해보면서 여기는 토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마지막 기항지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다 얽히고 설킨 이들이 모인 곳이라 문화나 정서가 짬뽕처럼 뒤섞였다는 의미로 지어졌어요. 갤러리 이름에도 지역적 특성이 담겨 있던 거였네요. 네. 그런데 그것까지는 관광객들이 잘 모르니까 와서 짬뽕을 찾으세요. 심지어 저희가 짬뽕을 만든 적도 없는데 서울에 몇몇 분들은 묵호에서 짬뽕을 먹고 왔는데 그렇게 맛있다고 소문을 내서. (웃음) # 프로젝트 미터×묵호 프로젝터 미터는 묵호를 기반으로 하는 창작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네, 맞습니다. 묵호에서 논골담길의스토리텔링, 기획, 프로그램 등 모두 저희가 진행 했구요. 최근에 중앙시장을 가보면 대형 벽화 작품들이 있는데, 재작년에 '컬러풀 묵호'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었어요. 계속 묵호에서 작업하고 있는 거죠. 논골담길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2009년 말이었는데, 동해문화원에서 컨설팅 제의가 들어왔어요. 묵호에 내려와서 이것저것 탐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그 마을을 작업하는 건데 묵호에 와서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서 내려오게 됐어요. 논골담길이 원래 고유 명칭은 아니에요. 논골에 있는 담화 골목길이다, 해서 제가 이름 붙인 거예요. 논골담길 창시자시네요! 네. (웃음) 그런데 다들 잘 몰라요. 관심도 없고. 저는 사실 벽화 마을을 안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거든요. 유명한 곳들은 다 어디서 본 듯한 예쁜 그림들 베껴서 그리고, 우르르 왔다가 막 그리고 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구요. 그런데 논골담길을 처음 왔는데 과한 거 없이 이 지역의 정체성을 그림으로 담아내고자 노력한 게 느껴지는 거예요. 제가 현장에 있는 사람이라 그걸 그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서 더더욱 벽화 마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 싫었어요. 저희는 어르신들이 스토리 텔러라고 해서 지역 해설사로 일하는데 제가 그분들을 교육해요. 이 지역에 대해서 이 길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면 되는지 알려드리는데 그때 벽화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담화라고 하거든요. '담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그리고 작가들을 선정하고 진행을 할 때도 지역의 정체성을 담고자 하는 작가들을 선정했구요. 기획 기간이 상당히 길었죠. 저희는 이걸 시즌제로 표현을 하는데 2009년 작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시즌 5까지 끝냈어요. 묵호에 연고가 있으세요? 아니요, 전혀 없어요. 그럼 어디 분이세요? 서울 사람이에요. 묵호에 내려오셨을 때 첫 느낌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제가 내려왔을 때만 해도 묵호에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어요. 5~6년 전만 해도 주말에 차가 이렇게 있지도 않았구요. 최근 들어서 볼 수 있는 풍경이에요. # 지역에 녹아 드는 예술 청원길을 작업할 때 주민들에게 하나하나 어떤 색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며 작업했다고 들었어요.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저희가논골담길할 때, 그때만 해도 제대로 협조가 된 집이 거의 없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할머니가 고추 다듬으러 나오면 그 옆에서 같이 다듬으면서 얘기했거든요. 이분들을 설득 하려면 일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리고 그런 모습을 봤을 때 저 스스로에게는 도전이 됐어요. 힘들다기보다는 값진 경험이었죠. 이렇게 5~6년동안 논골담길을 진행해서 인지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노하우가 많이 늘었구요. 지역 분들도 저희가 논골담길 작가라고 소개를 하면 굉장히 잘 협조 해주세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많이 느끼고 있죠. 그 누구보다 동네 주민들이 인정해 준다는 건 무척 뿌듯한 일이었을 것 같아요. 갤러리 묵호짬뽕을 운영하는 동안 마을 주민들이 많이 와줬거든요. 거기서 하는 말씀이 이런 걸 볼 수 있게 해줘서 참 고맙다고 하는데, 그럴 때 기분은 굉장히 남다르죠. 관광객들이 좋아해 주는 것보다 지역 주민이 가장 좋아해주고 반가워하니까 계속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논골담길 프로젝트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건데 왜 계속 남아 계세요? 저희가 완전 이주를 한지는 2년이 채 안 됐구요. 예전에는 의정부에 있어서 1년에 3~4개월 묵호에 머물면서 작업 했어요. 현장에서 진행을 할 당시에는 우리 스스로가 진정성 있다고 느끼면서 작업했는데 막상 끝나고 돌아가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에 집중하다 보니까 괴리감이 들더라구요. 아예 이주해서 거기서 고민을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려와서 도전하게 됐죠. 그만큼 대표님에게 묵호는 중요했던 건가요? 네. 물론 아는 사람도 없고 척박한 환경에서 쉽진 않았어요. 저 스스로한테는 논골담길을 해오면서 다툼도 있었고, 그 안에서 화해도 있었고, 그만큼 성과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고. 제 20대의 경험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쉽게 이곳을 떠나서 무언가를 해봐야겠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아요. 프로젝트 미터를 통해 묵호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게 될까요? 여기에 가장 유명한 오징어 축제가 있는데 오징어가 안 잡힌다는 이유로 폐지가 됐어요. 지역은 가능성이 있는데 관광객들이나 외부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레지던시를 기획을 하면서 더 멀리 바라본 게 바로 무코동블루스예요. 블루스라는 게 시각적으로 파랑을 표현한 것도 되지만 음악적으로도 사용되잖아요. 블루스를 활용해서 퍼포먼스, 거리극 등 다양한 장르가 나올 수 있는 거구요. 새로운 사례를 묵호에서 만들려고 고민 중이에요. 5년 후에 묵호는 어떤 모습일까요? 대표님의 5년 후는요? 사실 잘 그려지지가 않아요. 어떤 목표를 지니고 달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적은 없거든요.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처럼 어떻게 재밌게 지낼까 계속 고민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전보다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늘지 않을까요? 블루라는 색이 희망이나 미래 뜻도 있고 우울도 있지만 묵호의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재밌는 일을 만들어가면서 지역 주민과 함께 보냈으면 좋겠어요. 대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그는 한창 젊었다. 무척 앳된 얼굴에 깜짝 놀라고, 그와는 다르게 묵호에서 스스로 헤쳐나갔던 많은 이야기에 더욱 크게 놀라는 시간이 계속됐다. 젊은 친구가 묵호에 내려와 이런 것들을 해나간다고 했을 때, 막상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혔을지는 말을 아끼는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크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이곳에 있는 게 값지고, 소중한 시간이었으면 하지만 이곳에서 무언가를 이뤄야겠다는 큰 뜻은 없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니까 재미있으면 된다고, 무슨 일이든 장난 삼아가 아니라 재미 삼아 하고 싶다는 그는 묵호를 통해 재미있는 삶을 실현하고 있었다. 타지인, 젊은 친구, 예술가. 어쩌면 그는 이 지역에서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지닌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그의 가능성이고, 그가 만들어갈 묵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분명한 건 서툴고, 느리더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묵호를 칠하고 있을 그 덕분에 묵호를 알아가고 있는 사람이 점차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그려가고 있는 묵호는 분명 변해가고 있다는 거다. 홈페이지 : www.facebook.com/projectmeter 사진제공 : 프로젝트 미터
교수 : 교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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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교양]여론조사 제대로 보자
하루 늦은 강의 zoomer입니다. ^^ 날씨가 무척이나 추워졌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시죠? 연말 음주에 피로하시겠지만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죠. 오늘은 설문조사에 대해서 올려볼까 합니다. 내년은 4월이면 선거가 있습니다. 선거가 다가오면 매체에서는 각종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설문조사, 여론조사의 형태로 어떤 후보가 어떤 지역에서 1등을 하고 있는지를 앞다투어 보도하게 될껀데요. 이 때 눈여겨 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알면 좋고 모르면 바보가 되는 것이 설문조사입니다. 다음의 내용은 예시입니다. 1. 모집단 : 경기도 거주 만 19세 이상 유권자 ( 어느 지역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 2. 표본크기 : 1,015명 (집전화 514명, 휴대전화 501명) ( 총 몇 명인지 ) 3. 표본추출방법 : 성/연령/지역별 인구수 비례 할당 추출 ( 어떤 방법으로 표본을 추출했는지 ) 4. 표본오차 : ±3.1%포인트 (95% 신뢰수준) ( 요건 밑에서 ) 5. 조사방법 : RDD를 이용한 집전화 ․ DB를 이용한 휴대전화 조사 6. 조사일시 : 2014년 5월 17일 (1일간) 7. 표본크기 오차 보정방법 : 성/연령/지역별 인구비례 가중 적용 8. 조사실시: 한국갤럽 9. 응답률 : 16.8% 설문조사 결과를 해석 할 때 이러한 정보는 있어야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딸랑 그래프 하나만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표본크기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지역의 사람들 100명 정도만 뽑아서 나에대한 지지율이 다른후보 보다 크다라고 공개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걸 그대로 믿게 되는거죠. 그래서 설문조사는 신뢰할 수 있는 기관의 설문과 위 9가지 항목이 충실히 기입되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표본오차와 신뢰수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얘기드리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은 잘 조사되고 안내 내용이 충실한 여론조사입니다. 여기서 신뢰수준이란 : 우리가 내린 판단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지 확률로 표시하는 수치입니다. 더 쉽게 풀이하자면 신뢰수준 95%는 해당 여론조사를 95%정도 믿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동일한 상황에서 내린 판단이 100번중에서 95번 옳다라는 뜻입니다. 5번은 틀릴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90~95% 신뢰수준을 사용합니다. 신뢰수준이 낮으면 표본의 크기 ( 설문조사 대상자 ) 가 작아도 되고 높으면 더 많아야 됨으로 처음부터 신뢰수준을 설정해 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표본오차는 쉽습니다. 말 그대로 결과가 +- 의 변동이 있다는 뜻입니다. 설문조사의 신뢰수준이 100%는 없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오차는 생긴다는 의미죠. 한때 저번 대선 때는 오차범위내에서 박빙입니다. 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거 같은데요. +- 범위내에 두 후보가 존재하기 때문에 수치상으로는 1% 앞서지만 오차 범위가 +- 3% 라면 앞서는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 이제는 각종 찌라시 같은 설문조사, 여론조사에 속지 마시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교수 : 교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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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교양]장항선에서 만난 사람
푸른, 역. 푸를 청(靑), 곳 소(所). 말 그대로 푸른 그 역인 청소역은 뜨거운 햇살 정도 피할 수 있는 아담한 공간에 푸른 녹색 지붕이 고아한 정취를 풍기고 있는 곳이다. 현재 장항선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인 이곳 역시 여느 간이역처럼 8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질 예정이다. 나는 청소역의 택시운전사 청소역에 도착한 우리를 가장 처음 반겨준 건 대걸레였다. 그 옆에 역무원 아저씨의 근무복 역시 아주 쨍한 햇살 탓에 마른 장작같이 빳빳하게 말라가고만 있는 것 같았다. 청소역 아니랄까 봐 빨래와 청소 도구가 함께 놓여 있는 모습이 괜스레 우스우면서도 정겨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그런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한 아저씨가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역무원도 아니신 것 같은데, 기차에서 내린 승객 같지도 않은데, 우리가 기차에서 내린 이후에도 청소역의 입구 앞에 계속 서성이며 서 계신 모습이 의아할 찰나, 아저씨께서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사진 찍으러 왔냐고 묻는 아저씨는 그렇게 우리에게 아저씨의 이야기를, 그리고 청소역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시작했다. 최규호 택시운전사 사진 찍으러 왔어? 네. 여기가 장항선 최초 역이라고 해서요. 역이 예쁘다고 해서 직접 보러 왔어요. 사람들 자주 와요? 글치. 다들 이따 만한 카메라 들고 여기 찍으러 오더라고. 그런데 여기 이용객이 하루에 20명도 안 된다면서요? 20명 안 될 때도 많혀. 이제 뭐 열루 다니나. 20명도 안 되는데 택시 타는 사람이 있어요? 에이, 그래도 꽤 돼. 내가 이 동네에서 30년 동안 다녔으니께 단골도 있고, 일부러 나 찾는 분들도 많으니까 쉴 수가 없어. 여기가 버스가 불편혀. 그런데 여기 마을 사람들 병원 가려면 시내로 나가야 하니까 그때 택시들을 많이 이용하지. 또 간단히 이 근처 대천이나 그런데 다녀올 때 기차로 다니니께 그때 이용하기도 하고. 여기서 일하시면서 자제분들도 모두 키우셨겠어요. 글치. 자식 둘이 있는데 모두 대학 졸업했고. 큰애는 취업했고 또 하나도 취업했다가 지금 회사 옮긴다고 다시 준비하고 있는가벼. 원래 여기 주민이신 거예요? 아니지. 난 원래 태안 출신이여. 그러다 대천으로 이사 왔는데 그 뒤로 내 택시 운행 구역이 여기가 된 거지. 매일같이 출근하는 거지. 벌써 30년이나 되야 버렸어. 우와! 이 역의 산 증인이시네요. (웃음) (웃음) 원래는 여기 역명도 청소역도 아니었어. 진죽리에 있다고 해서 진죽역이라고 불렸는데 이름이 바뀐 거지. 청소는 그럼 무슨 뜻이에요? 여기가 보령시 청소면이여. 그래서 청소역인거여. 더 큰 지역을 포함하는 거지. 여기가 원래도 그리 큰 역이 아니었거든. 그래도 역무원도 꽤 있었는데 지금은 1명이 다 전담혀. 저기 봐봐, 여기는 그리고 발권도 이제 안혀. 여기서 차표 사려면 기차에 올라타서 사야 돼. 어느 샌가 이렇게 시간이 가버렸더라고. 그런데 여기 아까 없어진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역이 완전히 폐역이 되는 건가요? 그걸 난들 아나. (웃음) 그런데 장항선 직선화 사업 땜시 일단 없어지는 건 확실해진 거 같혀. 근데 이 역사 자체는 없애지는 않을 거 같아. 군에서 샀다고 들었는디? 뭐, 근대문화유산이란가 뭐란가 문화공간으로 꾸밀 건가 봐. 신 역사는 아직 언제 만들어질지는 모르는데 이 역 앞 건너 마을로 철로가 지난다고 하더라고. 뭐 언제 없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없어지기 전까지는 매일 나와야지. 아, 소식 들으셨을 때 착잡하셨을 것 같아요. 뭘 착잡혀. 다 사라지는 건데 뭘. 돈이 안 되니께. 늘 적자니께. 어떻게 운영을 하겠어. 청소역도 그 중 하나겄지. (웃음) 그래도 30년간 매일같이 나오신 곳인데 안 서운하세요? 우리도 사라지고, 역도 사라지고 다 그런 것 아니겄어. 그런데 역이 사라진다고 해도 정말 없어지기 전날까지는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혀. 내가 어디를 가겠어. 지금도 일년에 연휴 며칠 빼고는 늘 나왔어, 30년 동안. 아직 실감이 나지도 않어. 없어진다는 게. 어쨌든 전생에 무슨 연이었는지는 몰라도 난 이 청소역에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혀. 아저씨는 지난 30여 년의 세월이 어떻게 이렇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며 잠시 말끝을 흐리셨다. 아마 매일 같은 일상 속 너무나 당연시 여기던, 그렇게 무던히 지나가는 하루였을 텐데 생각지도 못한 우리들의 질문에 꽤 느리게, 지난 날을 거듭 돌이켜보시는 듯 했다. 느릿느릿 충청도 말투라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말이 30년이지 아직 3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보지도 못한 나에게 그 세월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같이, 그 하루하루가 모여 이뤄낸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저씨의 인생엔 청소역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곳에서 택시 운전을 하시며 결혼도 하셨고, 아이를 낳았고, 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정을 나눈 그 세월 동안 청소역은 어쩌면 지금의 아저씨를 있게 해준 모태이지 않을까라는 거대한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역을 이용하는 사람은 정말 10명이 채 될까, 말까? 그러나 우리와의 대화 중간 중간 아저씨를 찾는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왔다. 청소면 사람들을 역과 이어주고, 그 역에서 다시 청소면으로 이어주는 아저씨는 어느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기도 했다. 30여 년을 드나들었지만 청소역에서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찍어본 적 없다는 아저씨에게 사진 한 장을 찍어드려도 되겠냐고 요청했다. 무슨 사진이냐며 손사래를 치지만 그 손사래가 쑥쓰러움의 손사래라는 건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없는 이 공간 안에서 아저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쩜, 그 뒤에는 큰 창으로 뜨거운 여름 햇살이 쏟아졌다. 아직은 영글지 못한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그 자리에서 청소역 여름의 한 장면은 아저씨와 함께 하나의 그림으로 이렇게 완성됐다.
교수 : 교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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